Cultural Remains
		영암의 소중한 문화유산의 수집과 보존, 전시에 앞장서겠습니다.

그의 도일배경(渡日背景)

박사 왕인은 그로부터 2년후 20세의 나이로 문산재 조교의 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박사왕인의 학덕은 왕실과 도성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신왕(阿辛王)은 박사 왕인을 여러차례 불러 태학(太學)에서 일하여 줄 것을 종용하였다. 왕은 박사 왕인을 태자의 스승으로 삼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박사 왕인은 거절했다. 그는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은고(恩顧)를 입어온 문산재에서 후학을 양성할 뜻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왕도 결국은 박사 왕인의 뜻을 이해하고 더 이상 종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신왕은 틈틈이 박사 왕인을 도성으로 초빙하여 태자 전지와 서로 벗하며 경륜을 논하도록 했다. 전지도 경전을 능히 해독할 수 있는 학문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태자 전지는 박사 왕인의 높은 학덕과 깊은 경륜에 감탄했다. 박사 왕인은 오경에 통달하였으므로 사람의 관상을 마음속으로 꿰뚫어 보았다 한다. 어느날 박사 왕인은 태자를 가까이 모시고 있는 터이라 태자에게 부왕과 잠시 이별하여 물을 건너 멀리 떠나게 될 것이라고 아뢰었다고 전해진다. 이무렵 아신왕은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함은 물론, 제16대의 진사왕(辰斯王)때 고구려에 빼앗겼던 10여개의 성을 다시 탈환코자 계획을 세웠었다.

그리하여 아신왕 6년(397년)에 이미 근초고왕때부터 백제와 선린 관계를 유지해 왔던 일본과 더욱 깊은 수호관계를 맺고 원호를 청했다. 이때 태자 전지를 볼모로 결정했다(三國史記 百濟 阿辛王條 : 六年夏 五月 王與 倭國結好 以太子 支爲質). 그가 바로 일본에서 말하는 아직기 즉 아지길사(阿知吉師)이다. 일본에 건너간 아직기는 볼모의 몸으로 일본 응신(應神)천황의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당시 일본은 문자가 없어 구구상전으로 원시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대화(大和)를 중심으로 고대국가의 형태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인륜·도덕도 그 기틀이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백제는 북방으로 부터는 중국문화의 많은 영향을 받아왔고 낙랑·대방과는 지리적으로 밀접하여 교섭이 잦았으므로 국가질서의 수립이나 문화적 지반에 있어서는 고구려보다 앞서 있었다. 백제 중흥을 이룬 제13대 근초고왕이 즉위하게 되니, 이때 백제의 문화는 그전성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는 학술과 문예가 발달하여 경사(經史)·문학으로부터 음양오행·역본·의약·복서(卜筮)·점상(占相)에 이르기까지 각각 전문분야의 기술자를 배출하고 있었다. 그당시 백제에는 오경박사만이 아니라, 의학·역상(曆象)·복서 등 각 분야의 전문적인 기술자에게 박사 칭호를 부여하여 의박사·역박사(曆博士 = 卜筮)·노반박사 와박사(瓦博士)등의 박사제도가 있었다.

일본, 백제문물 받아들여

미개한 일본은 백제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 들이기에 혈안이 되었다. 백제와 일본의 정치적·문화적 교섭은 근초고왕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양국은 항상우호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삼국중에서도 일본과 가장 많은 문화적 교류를 이루어 온 나라는 백제였다. 볼모로 일본에 건너간 아직기는 일본에 태자 토도치랑자만이 아니라 대신들에게도 한학을 가르쳤다. 인륜법도에 대해서도 강론했다. 응신천황은 아직기를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러나 아직기는 슬펐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다. 꿈에도 잊지못할 조국과 부왕이 그리워 못견디었다.

한편, 박사 왕인은 문산재에서 학덕이 높은 군자로, 우매한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도자로, 그리고 관상을 잘보는 상사(相師)로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에게 수학코자 하는 제자들로 문산재와 양사재는 비좁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실명(失明)으로 세상을 살아 오던 그의 노모가 세상을 뜬 것이다. 박사 왕인의 나이 27세였고, 그의 어머니는 73세였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애통하기 그지 없었다. 그 이듬해 박사 왕인은 문산재의 상좌(上座)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8세의 나이로 문산재에 입문하던 날, 그 영특하고 명쾌한 답변으로 노교수와 서생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신동 왕인도 이제는 어엿한 대학자가 된 것이다.

이무렵, 백제를 사부국(師傅國)으로 삼고 문물을 전수받고자 광분했던 일본의 응신천황은 아직기에게 "그대의 나라에는 현인과 군자들이 많다 하니, 그대보다 더 나은 박사가 있는가"하고 물었다. 아직기는 박사 왕인이 거유요 현인이라고 대답했다. 응신천황은 황전별(荒田別)과 무별(巫別)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아직기와 더불어 박사 왕인을 초빙해 오도록 하명했다. 백제의 태자 전지( = 阿直岐)가 일본에 볼모로 건너간지 7년만에 귀국한 것이 아신왕 13년(404년)의 일이었다. 그해 춘삼월 박사 왕인을 일본으로 초빙하기 위해 태자 전지를 실은 돛배는 이림의 상대포(上臺浦)로 향했다. 상대포는 성기동에서 반마장쯤 되는 곳에 자리잡은 외국선박의 출입이 잦았던 곳으로서 일찌기 무역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상대포서 백제 태자와 渡日

박사 왕인은 미리 전갈을 듣고 상대포에 나가 태자를 만났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태자와 박사 왕인은 문산재에 당도 하였다. 환영나온 국민들이 문산재의 마당을 메웠다. 태자는 박사 왕인을 만나러 온 목적과 응신천황의 뜻을 전달했다. 박사 왕인은 너무 충격적인 전갈을 듣고 심사묵고(沈思默考)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문산재의 서생들 뿐만이 아니라 성기동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무렵 아신왕은 노해(勞咳 = 肺結核)증세가 악화되어 줄곧 병상에 누워 있었다. 왕실에서는 내적으로 왕위계승의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태자 전지가 일본에 볼모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때 왕인은 태자 전지가 볼모에서 풀려 어서 귀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었던 태자 전지를 대신하여 왕인 스스로 일본 황실의 사부(師傅)가 된다면 전지 태자의 귀국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박사 왕인은 도일할 것을 결심했다. 그것이 왕실과 태자를 위한 충성의 길이요 신하의 도리라 생각했다. 다음날부터 박사 왕인은 책굴(冊窟)로 들어가 일본에 가지고 갈 책을 쓰기 시작했다.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갈 계획이었다. 글자 하나 하나에 온 정성을 다 쏟았다. 이무렵 석공(石工) 추하주(秋河朱)가 찾아와 책굴 입구에 박사 왕인의 석상(石像)을 새길것을 간청했다. 어느때 귀국할지 모르는 박사 왕인의 석상이라도 새겨 후학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상대포를 바라보는 왕인 석상은 섬세하고 정교하게 각인되어 40일만에 완성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석상은 분명히 박사 왕인의 분신임에 틀림없다. 왕인의 모습이 그의 고국에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는 것은 오직 이 석상하나 뿐이다. 이 석상은 오늘도 1천6백여년전 돛배로 고국을 떠났던 상대포를 바라보고 있다.

아신왕 14년(405년) 1월 29일. 상대포에는 5척의 범선이 도일할 태자 전지와 박사 왕인, 그리고 기술자 45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떠나던 날 박사 왕인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 모두 그의손을 부여잡고 석별의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다. 박사 왕인의 눈에도 물기가 괴었고, 시야가 흐릿해 졌다. 월출산, 문산재, 성기동을 돌아보고 또 되돌아보고 발걸음을 차마 옮기지를 못했다. 상대포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도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박사 왕인은 조상이 계신 곳을 향하여 땅바닥에 엎드려 눈시울을 적시면서 재배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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